이태원 클래스의 주인공 박새로이는 '소신껏 행동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집니다. 메시지는 저에게 강하게 와닿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소신을 지킨다'라는 흔한 소재가, 어찌된 일인지 참신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 호소력의 근원이 이질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http://tv.jtbc.joins.com/itaewonclass

 

이질감, 정확히는 '이질감을 얼마나 잘 극복하느냐'는 작품성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조커와 기생충에서, 살인을 행하는 주인공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 것은, 찝찝함입니다. 살인의 당위성에 공감의 여지를 두기에 위험한 영화라는 평도 적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각본의 튼튼한 장치 없이는 관중과 독자의 이질감을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신있는 삶 좋습니다. 하지만 손해가 우려되는 난처한 상황에서, 소신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히 이질적입니다. 이질적이면서도 참신합니다. 소신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저울질 없이 직진하는 것은 클리셰를 부셔버리는 것입니다. 이질감 역시 가볍게 극복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의 태도로 감상하다가도, 몇 화만에 당연히 소신에 따라 굴복하지 않을 주인공의 행동을 예상하면서 지켜보게 되니까요.

 

 

누군가는 소신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중한 가치의 상실을 걱정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욕심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태원 클라쓰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품 역시 그러한 이유를 소신이 흔들리는 장치로 삼습니다. 현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신을 지킬지 굽힐지에 대해 고민하는 상황이 이것 뿐은 아닙니다.

 

 

저는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로 불확실성을 꼽습니다. 개인의 소신은 결코 절대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의 윤리학도 선을 하나로 귀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행동이 언제나 소신을 따를 수는 있을지라도, 소신을 따른 행동이 언제나 선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언명령에 따르는 소신일지라도(칸트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공리주의).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구요. 어떤 선택이 선한지 알 수 없기에 우리의 삶은 불확실한 선택들의 연속입니다. 그렇기에 소신을 굽히는 것이 그른것도, 소신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매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소신에 망설임 없는 주인공의 태도는 정말 이질적입니다. 심지어 그 소신 때문에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고, 단밤도 수차례의 위기를 겪는데도 대쪽같이 소신을 지킵니다. 복수심 때문에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그의 태도는 이질감을 넘어 이해가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언제나 선택에 최선을 다했고, 무엇보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몫으로 묵묵히 지고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소신을 굽히지 않는 것에 회의적인 저와 같은 관중까지 끌어옵니다. 여전히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을 굽혀서는 안된다는 박새로이라는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새로이들의 밤이 좀 더 달콤하길 바라봅니다.